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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과 19세기의 기억 이론은 무엇이었는가

by BINee 2022. 9. 3.

로마인들

로마인들은 이론적으로는 기억에 별 기여를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B.C. 1세기의 키케로와 A.D. 1세기의 퀸틸리아누스를 포함한 로마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기억에 관한 밀랍 조각 가설을 의심의 여지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연구하지 않았다. 그들이 크게 공헌한 분야는 기억법의 개발이었다. 연결 기법(Link System)과 공간 이용 기법(Room System)을 처음으로 고안해 낸 것도 그들이었다.
이 두 기억법에관해서는 뒷장에서 설명될 것이다.

기독교회의 영향

그 다음으로 기억에 이론적으로 크게 기여한 사람은 A.D. 2세기의 위대한 내과의사였던 갈레노스였다. 그는 여러 가지 해부학적, 생리학적 구조의 위치를 찾아내어 그림으로 그리고 신경조직의 기능과 구조에
관해 연구했다. 그리스인들처럼 그도 기억과 정신 과정은 동물의 하등한 정신의 한 부분인데 두뇌의 양면에서 만들어지고 그 결과 기억이 그곳에 자리를 잡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두뇌는 공기로 가득 차 있으며 이 공기는 활기찬 정신과 혼합되어 있고 이 혼합물이 신경계를 통해서 아래로 밀려내려 가서 인간들로 하여금 감각을 경험하게 하는 동물적인 정신을 만들어낸다고 믿었다.
갈레노스의 이론은 교회에 의해 빠른 속도로 받아들여졌다. 그 당시교회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론은 확고한 교리가 되었고 그 결과 1,500년 동안 이 분야는 거의 발전이 없었으며 이 지적 억압이 철학과 과학이 배출해 낸 몇몇 위대한 두뇌들을 질식시켰다.
기원 4세기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억이 영혼의 기능이고 영혼은 두뇌 속에 있다는 종교적 이론을 펼쳤으나 결코 이 이론을 해부학적인 면으로까지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시대부터 17세기까지는 이렇다할 중요한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17세기에 와서조차도 새로운 이론들은 교리의 억압을 받았다. 이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 데카르트도 갈레노스와 이론을 같이 했으나 데카르트는 동물적인 정신은 뇌 속의 송과선을 통해 기억이 유발되는 곳으로 보내진 다고 생각했다.
동물적인 정신이 송과선을 통해 이동할 때 이 과정은 더욱 분명하고 더욱 촉진될 것이라는 이론을 바탕으로 기억 향상과 기억 흔적을 설명했다. 기억흔적은 학습에 들어가기 전에는 나타나지 않는 신경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변화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지나간 것을 회상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바로 이 기억 흔적이다.
이 분야에 공헌한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철학자는 토마스 홉스이다. 그는 이전의 기억 이론들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기억에 대한 비물리적인 설명을 거부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그는 기억의 진정한 본질을 명확히 밝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정확한 위치를 밝히려는 중요한 시도조차도 하지 않았다.
갈레노스와 교회의 압제적인 영향이 얼마나 심했었는가는 17세기 지식인들의 이론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사실상 모든 위대한 사상가들이 기억에 관한 초기 이론들을 조금의 의혹도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과도기 - 18세기

르네상스와 뉴턴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사상가는 18세기의 데이비드 하틀리였다. 그는 뉴턴의 이론을 진동 입자에 적용시켜 기억 진동 이론을 주장했다. 인간의 뇌에는 출생이전부터 시작된 기억 진동이라는 것이 있다.
새로운 감각들은 기존의 진동의 정도, 종류, 위치,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새로운 감각의 영향을 받은 후 진동은 재빨리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똑같은 감각이 다시 나타나면 진동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시간이 약간 길어진다. 이런 과정이 계속되면 마침내 진동은 새로운 상태에 남아 있게 되고 기억 흔적이 생겨난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이 시대의 다른 주요 사상가들로는 자노티와 보네트가 있다. 자노티는 최초로 전력과 두뇌기능을 연계시켰고, 보네트는 하틀리의 이론을 신경 섬유의 유연성과 관련, 발전시켰다. 신경은 자주 사용될수록 쉽게 진동을 일으키고 그 결과 기억도 좋아진다는 것이 보네트의 이론이다.
자노티와 보네트의 이론은 그것들이 과학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면에서 이전의 이론들에 비해 상당히 진보한 것들이었다.
이 이론들은 현대의 기억이론을 탄생시킨 밑거름이 되었다.

19세기

19세기 독일에서의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기억에도 몇 가지 중요한 진보가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주장했던 많은 이론들이 배격당하고 기억 분야는 생물학적 차원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생리학자 게오르그 프로차스카는 과학적인 근거도 입증할 자료도 없는 낡은 동물적 정신 이론을 과감히 거부했다. 기존의 한정된 지식으로 뇌 속에서의 기억의 위치를 찾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기억을 뇌 속에 공간적으로 제한할 수는 있지만 그 당시의 지식수준은 그것을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고 그는 말했다.
기억 기능의 위치를 알아내는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50년도 채 되지 않았다. 19세기에 등장한 또 다른 주요 이론은 프랑스 생리학자 피에르 플로렌스의 것으로 기억은 두뇌의 모든 부분에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두뇌의 작용은 종합적이므로 작은 부분들의 상호작용으로 생각할 수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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